
1592년 5월 7일(이하 날짜는 음력) 합포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함대는 그날 밤 남포(藍浦) 앞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남포는 임진장초에서 이순신 장군이 창원땅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칠원땅이다. 남포는 칠원현의 월경지 속현인 구산현 소속으로 현재 지명으로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난포리다. 원래 지명이 남포였으나 1993년에 지역민들이 동네 이름을 난포(卵浦)로 바꿔버렸다.
남포에서 밤을 새운 이순신 장군은 5월 8일 이른 아침 왜선이 고리량(古里梁)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고리량은 현재 지명으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와 저도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속칭 '콰이강의 다리'가 있는 곳이다. 곧바로 출동한 이순신 함대는 고리량 일대의 작은 섬들인 쇠섬, 장구섬, 징섬 등을 샅샅이 수색한 후 저도를 지나 고성땅 적진포(積珍浦, 경남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 남촌진)로 향했다.
적진포에 이르니 13척의 적선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왜군은 민가를 분탕질하고 있었다. 이들 왜군은 갑자기 나타난 조선수군의 위세에 놀라 일부가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곧바로 전투에 돌입하여 낙안군수 신호와 순천대장(代將) 유섭이 힘을 모아 적 대선 1척을 격파했다. 무과 급제자인 박영남과 보인(保人) 김봉수 등도 힘을 합쳐 적 대선 1척을 격파했다.
보성군수 김득광, 방답첨사 이순신(이순신 장군과 한글 이름이 같은 무의공 입부 李純信), 사도첨사 김완, 녹도만호 정운도 왜군 대선 1척을 각각 격파했다. 귀양살이하던 전 봉사 주몽룡은 왜군 중선 1척을 격파하고, 이순신 장군의 군관인 이설과 송희립이 힘을 합쳐 왜군 대선 2척을 격파했다.
군관 정로위와 이봉수가 힘을 합쳐 왜군 대선 1척을 격파하고, 군관 송한련도 왜군 중선 1척을 격파했다. 임진장초 기록에 따르면 조선수군은 이날 적진포에 정박해 있던 적선 13척 중에서 11척을 포격과 불화살을 이용하여 당파분멸(撞破焚滅)했다.
압도적 승리를 거둔 조선수군은 아침밥을 먹고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향화인(向化人) 이신동이 조선수군을 바라보고 산꼭대기에서 갓난 아기를 안은 채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이순신 장군은 작은 배를 보내어 이신동을 싣고 와서 왜군의 만행을 물어보았다.

이신동은 "왜적들이 어제 적진포로 들어와 민가를 약탈하여 재물을 싣고 저들의 배로 가져갔습니다. 바다 가운데 배를 띄워 놓고 소를 잡아 술을 마시면서 밤새 피리를 불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숨어서 들어보니 곡조가 모두 조선 노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왜군의 절반 정도는 배를 지키고 나머지 절반은 고성으로 갔습니다. 저의 늙은 어머니와 처자는 적을 보고 놀라 피란하다가 서로 헤어졌으며 간 곳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애원하는 모습이 너무도 가련하여 이순신 장군은 이신동을 아기와 함께 데리고 가려 했지만, 그는 어머니와 처자를 찾아야 한다며 함께 가기를 사양했다. 이신동의 이야기를 들은 조선수군은 왜군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불타올라 가덕, 천성, 부산 등지의 적을 쳐부술 계획을 세웠으나, 선조가 관서로 피란한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함대를 돌려 5월 9일 정오경 여수로 복귀했다.


적진포해전의 승리 요인은 미리 수집한 정보를 기초로 철저한 수색작전을 벌여 적의 종적을 정확하게 파악한 데 있다. 고리량 일대에 적이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아침 일찍 그 일대를 수색한 후에 적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고성땅 적진포로 향한 이순신 장군의 판단은 적중했다. 현장 지휘관의 정보 수집 능력과 탁월한 판단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전투를 끝내고 피란민을 따뜻하게 돌보는 이순신 장군의 애민정신은 민초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봉수 논설주간]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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