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선 소감]
뜻깊은 상을 제정하고 벌써 8회째 시행하고 있는 <코스미안뉴스>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또 제 글을 읽고 평가해 주신 심사위원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날 인문학이 더없이 중요해졌다고 다들 외치지만 정작 인문학을 육성하기 위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아쉽게만 느껴지는 현실에서, 우연히 코스미안상이라는 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알게 되어서 다소 고민을 했습니다만, 우리 사회와 시대에 호소하고 싶은 바가 있어 서둘러 글로 지었는데, 이렇게 전할 기회를 얻고 또 평가도 받아서 무척 감사합니다.
미력이나마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지성을 높이는 데 헌신하는 <코스미안뉴스>와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칼럼] 엠비티아이MBTI 시대 유감
김수영 시인은 “시를 안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라 말했다. 시는 사람의 감정을 노래한다. 거기엔 인간 존재의 본질에서부터 시대적 현실, 역사적 상황 등 삶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얽혀 들어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공자는 “안다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라 정의했고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도 “미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라고 통찰했다. 결국, 사람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의미다. 종합하면 이렇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도 진리 전체가 동원된다.”
과거에 왕들은 높은 학식이나 지성을 지닌 사람을 국사國師로, 즉 나라와 임금의 스승으로 두려고 애썼다. 진리를 깊고 풍부하게 터득한 사람일수록 누군가를 정확하고 깊이 파악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때 늘 조심하게 되는 까닭도, 그때 나의 지성적 수준도 폭로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는 동원 가능한 진리의 양에 비례한다. 하지만 동원할 지성이나 진리가 없거나, 그런 걸 동원하는 수고가 귀찮은 초등학생들은 툭 하면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요, 엠비티아이mbti가 어떻게 돼요?”
엠비티아이가 유행하는 시대는 불행하다. 자신의 지성과 철학으로 파악해야 할 대상을 자기 외부의‘인간 분류시스템’에 의존하는 비주체적인 방식이 곧 엠비티아이다. 사람들이 “너 T야?”, “난 F야”라는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더는 지성과 진리가 동원되지 않는 몰지성적 시대의 초상을 보는 듯 참담한 기분에 젖는다.
하지만 엠비티아이의 가장 심각한 병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인간 개별성의 무시다. 이를테면 반대파를 무참히 숙청했던 것으로 악명 높았던 옛 소련의 통치자 스탈린Stalin조차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병사 천 명의 사망은 통계지만 병사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한 병사의 죽음은 전사자 ‘천 명’ 중 하나가 아니라 오직 ‘그 한 사람’의 죽음으로서 바라볼 때 그 진정한 비극적 진실이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한 사람씩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어떤 집합이나 전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성의 존엄성을 지닌다. 이 점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 엠비티아이다. 그것은 나를 나 자체로 이해하지 않고, 나를 특정의 인간 성격 집합으로 유형화해서 그 집단 속에 집어넣은 다음, ‘넌 대략 이런 부류의 사람이야’라고 뭉뚱그려버린다.
내가 아니라, 내가 분류되어 속해진 어떤 집합의 성격을 나의 성격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그것은 오직 한 사람인 나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박탈해버린다는 점에서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다. 가령 어느 회사에서 ‘디자인’ 일을 할 사람을 뽑는다고 공개모집을 냈다고 가정해 보자. 한 남성이 지원하자 “남자는 안 뽑아요. 남자들은 섬세한 감성에서나 공간에 대한 미적 능력이 떨어지니까요.”라고 탈락시켜버린다면 순순히 수긍할 수 있을까.
게다가 엠비타아이는 근본적으로 분류법이며, 분류법은 그 자체가 철저히 근대세계의 산물이다. 18세기 중반 린네Carl von Linn의 식물분류학, 동물분류학과 함께 분류학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근대세계가 열리자 사람들은 이성의 힘으로 모든 것을 지배,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문명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념을 맹신한 것이다. 지배하기 위해서는 관리가 필요하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는 근대세계를 한마디로 ‘관리국가의 탄생’이라고 정의했다. 효율적인 지배와 관리를 위해서는 관리 대상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필요하였고, 그리하여 인구 관리, 재정 관리, 창고 관리, 재산 관리, 환자 관리 등등 수많은 분류 체계들이 전 사회에 도입된다. 기업들에서도 직원들을 능력별, 성격별, 업무 스타일별로 나누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관리할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 이러저러한 ‘인간 분류법’들이 확산했다. 이것이 엠비티아이와 같은 인간 분류법들의 기원이다. 이처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배자-관리자의 위치에서 인간을 물건처럼 ‘관리하고 분류하기’ 위해 고안된 것을 가족과 친구, 동료와 이웃들에게 들이대어도 괜찮을까?
사람들이 하도 “엠비티아이가 어떻게 되죠? E예요, I예요?”라고 물어대는 통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검사에 응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질문에서 나는 시쳇말로 ‘멘붕’에 빠져야 했다. 도무지 각 선택지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이런 점도 좀 있고 저런 점도 좀 있는 것 같았지만. 엠비타아이는 오직 하나만 고르기를 요구했다. 어떤 선택지를 선택한다고 해도 내가 완전히 그러하다고 자신하기 어려웠고, 어떤 선택지를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완전히 그러하지 않다고도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정말로 오직 하나의 면만 지닌 사람이 있을까? 인간의 내면과 성격, 인격은 다면체가 아니었던가?
고심 끝에 나는 그나마 빈도수가 높다고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바를 선택하기로 결정했다.하지만 다음 질문에서는 그 기준은 버리고 다른 기준을 다시 세워야 했다. 어떤 질문에서는 ‘주관적’ 느낌‘보다는‘ ’실제로 나타나는 행동’이 기준으로 작동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런 식으로 선택 기준은 불가피하게 자꾸만 바뀌어야 했고, 나중엔 결국 “아니, 이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나를 규정할 수가 있지?”라는 회의가 밀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을 토로하자 “맞아. 나도 그랬어”라고 말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엠비티아이는 이처럼 인간 내면의 다면성과 다층성, 통시적 생성성과 변형성을 완전히 망각한다. 누구든지 세월이 흐를수록 성격이나 인격이 점점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지게 마련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점점 더 다양하고 풍부한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해 간다. 삐죽빼죽하던 돌멩이가 강물을 타고 하류로 흘러 내려올수록 동글동글한 예쁜 조약돌이 된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영원히 T인 사람이 있을까? 또는 그렇게 하나의 고정된 성격을 밀어붙이며 살아가는 사람을 과연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면 엠비티아이의 모든 분류 기호가 나타나는 사람, 다시 말해 E이면서 I이고 F이면서 T이며 J이자 동시에 P인 사람, 그처럼 다층적이고 전인적인 인격의 소유자일 것이다, 우리가 목표하는 자아의 이상적인 모습도 그런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자신이 풍부한 성격과 인성을 지닌 사람이기를, 그래서 삶의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다채로운 삶의 기술을 지닌 사람이기를 원한다. 나아가 그런 다층적이고 다면적 인격체들로 사회가 채워진다면 그게 곧 우리가 바라는 높은 인간 존엄성의 사회 아닌가.
고통이 있는 곳에 죄가 있다. 자연재해를 제외하고 나면 인간을 슬픔과 고통에 빠트리는 것은 모두 누군가의 그릇된 인성과 인격, 그 때문에 생겨나는 그릇된 인식, 그릇된 판단과 결정들이다. 민주주의 사회에 산다는 건 내 주변에 아름답고 현명한 타인들이 많을수록 내가 ‘독배’를 마시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의미다. 인격은 나의 의무다.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는 다양한 인격을 지닌 사람, 풍부하고 올바른 인식을 두루 갖춘 사람, 그래서 대상과 상황에 따라 수시변통隋時變通하며, 다양한 개별적 개인들을 다양하게 배려할 수 있는 풍부한 삶의 기술을 지닌 사람이 될 의무가 있는 셈이다.




